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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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人터뷰] 축구계의 ‘풍운아’ 성한수를 아시나요?   15-09-09
대학연맹   13,90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380&aid=0000… [2223]
 

[이영미人터뷰] 축구계의 ‘풍운아’ 성한수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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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호남대 축구부를 대학 정상에 올려 놓은 성한수 감독이다.(사진=이영미)>
 
축구선수 성한수(39)는 ‘풍운아’였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고교랭킹 톱클래스 공격수로 꼽히며 대학과 프로팀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그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심판 폭행 사건에 연루돼 3년 출전정지 징계를 받으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후 1년 6개월로 징계가 감해졌고,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연세대 축구부에서 그를 받아들이며 기사회생했지만 입학 후에도 한동안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다. 2학년 때부터 징계가 풀리며 공식 경기에 나섰고, 이후 1999년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대전 시티즌에 입단했다가 2002년 1월 이적료 7억 원을 받고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지만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다 소리 소문 없이 은퇴를 했다. 

그런 그가 ‘성한수’란 이름으로 언론에 오르내린 건 최근 강원도 양구 종합운동장에서 막을 내린 ‘KBSN 추계 1,2학년대학축구대회’ 결승전에서 호남대가 울산대를 3-2로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호남대의 우승을 이끈 감독이 성한수였기 때문이다. 성 감독은 이 대회 최우수지도자상도 거머쥐었다. 

축구부의 우승 이후 호남대학교 앞에는 우승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서너군 데 걸려 있었다. 그 플래카드 앞에서 성 감독을 만났다. 

이번 우승이 여러모로 극적인 우승이었더라고요. 

“그렇죠.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가 2골을 먹는 바람에 패색이 짙었으니까요. 그러다 후반 들어 2골을 따라 붙었고 연장 후반에 그림 같은 중거리 슛이 터지면서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짜릿했어요. 감독인 나도 우승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데, 선수들이 그걸 만들어줬어요. 지금도 우승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털이 곤두 설 정도예요. 대단한 결승전이었습니다.”

우승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승하고 싶지 않은 감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팀 전력을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우승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거든요. 결국 운과 선수들의 의지가 우승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결승까지 오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예선전에서 조 2위로 본선에 올랐어요. 본선 1차전이 조선대와의 경기였는데 먼저 골을 먹고 나서 동점골을 터트린 후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그 다음 경기였던 조선이공대랑은 한 골 먼저 넣고, 두 골을 내리 먹다가 나중에 살아나서 동점골을 터트렸습니다. 결국 그 경기에서 3-2 승리를 거뒀죠. 배재대와의 준결승전을 앞두고선 선수들에게 이런 얘길 해줬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4강 진출이었거든요. 그 목표를 이미 달성했지만 프로팀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받으려면 무조건 이겨라. 너희들의 실력을 보여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2-1로 이겼습니다. 마지막 울산대와의 결승전을 앞두고선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승에 올라가니까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 같더라고요. 전반에 2실점 하고 나서 라커룸으로 들어온 선수들에게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걸 운으로 올라왔다는 뒷담화는 듣기 싫다. 우리가 운이 아닌 실력이었다는 걸 너희들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주길 바란다. 골 먹는 게 두렵지 않다. 그러나 ’운발‘이었다는 비난은 결코 듣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의 눈빛이 또 달라지더라고요. 후반전에서부턴 몸놀림이 틀렸습니다. 죽기살기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한 골만 들어가면 반전이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골을 내리 꽂아 넣더라고요. 공격수들의 체력이 많이 소진된 것 같아서 연장전 때 유인웅 선수를 투입했는데 그 선수가 연장 후반 1분 만에 역전골을 터트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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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 호남대 선수들과 성한수 감독.(사진=대한축구협회)>
 
마치 ‘작두’를 탄 것처럼 선수 교체가 제대로 들어맞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0-2로 지고 있을 때는 거의 우승에 대한 마음을 접었습니다. 스스로 결승까지 올라간 것도 대견하다며 위로를 했으니까요. 유상철 감독이 이끄는 울산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호남대보다 월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팀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전날 연장까지 가며 준결승전을 치르고 올라온 울산대를 끝까지 괴롭히면 우리한테도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울산대가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그 점을 공략한 게 우승으로 이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평생에 이런 게임을 또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주전 골키퍼가 결승전 이전에 부상을 당했다면서요? 필드 플레이어가 결승전 골문을 지켰다고 하던데요.

“주전 골키퍼가 부상이었고, 백업 골키퍼도 예선전에서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골문을 지킬 선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는 김재인 선수에게 골키퍼를 맡겼습니다. 선수로선 골키퍼보다 그라운드에서 뛰어 다니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은 팀을 위해 자신을 내려놔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걸 김재인 선수가 맡게 된 겁니다. 실수해도, 골을 먹어도 무조건 박수를 쳐줬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김재인 선수한테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런 점들이 선수 스스로 자신감을 찾게 된 요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대회 6경기에서 호남대가 득점한 골이 20골이나 되더라고요.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두세 골 이상은 넣으라고 주문했어요. 전문 골키퍼가 아닌 선수가 골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일단 공격에서 골이 많이 나오는 게 중요했거든요. 전 미드필드 지역에선 최대한 간결하고 빠르게 상대 진영으로 치고 올라가는 걸 선호합니다. 일단 상대 진영 안에서 골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미드필드 지역에서 시간 끄는 걸 매우 싫어하죠. 우리 팀 수비 라인도 그리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진 않습니다. 수비가 뚫리면 대책이 없는데 그걸 주장인 윤경보 선수가 제대로 막아줬습니다.”

(성한수 감독은 지난 6월 호남대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 후 처음 맞이한 울산대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전담 골키퍼의 부재가 걱정을 더했다. 그래도 위안이 됐던 건 부상이나 경고 누적 선수가 없어 스쿼드 운영하는데 여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은퇴 후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원래는 2012년 12월에 임관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호남대 코치로 선임됐어요. 그러다 임 감독님이 전남 드래곤즈 코치로 옮겨 가면서 감독 자리가 제게 주어진 거죠. 지도자 생활의 출발은 2007년 한민대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상태이고요. 이준재 감독님 밑에서 1년 6개월가량 코치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축구클럽에서 유소년들을 가르치다 천안에 성한수 FC클럽을 만들게 됐었죠. 호남대로 오면서 그 클럽은 후배에게 물려줬습니다.”

성 감독은 고교랭킹 톱클래스로 꼽히던 공격수 출신이었어요. 1990년대 고교 축구에서 성한수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는데 고3 때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며 축구인생이 꼬였었죠?

(성한수는 1993년 KBS배 추계중고축구대회에서 한 경기에 무려 4골을 터트렸고, 1994년 전국중고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선 혼자 2골을 넣으며 문일고가 부평고를 꺾고 2-1우승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가장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당시 심판을 폭행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대전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이었어요.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인해 경기에 패하면서 학부모들이 경기 후 심판을 찾아갔던 거죠. 물론 학부모가 심판을 찾아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심판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어요.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저로선 눈이 뒤집혀진 거죠. 결국 심판을 향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에 엄청난 후회를 했어요. 그 폭행으로 인해 아버지도, 저도 심한 상처를 받았고, 전 축구를 그만둬야 하는 위기를 겪었으니까요. 진심으로 후회했고, 반성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축구하면서 폭언을 한 적도, 폭행한 경험도 없었습니다. 우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대가는 굉장히 혹독했어요.”

그래도 당시 연세대 축구부를 맡고 있던 김호곤 감독의 배려로 인해 연세대 입학을 하지 않았나요?

“네. 김호곤 감독님이 절 연세대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전 축구를 그만뒀을 겁니다. 대학에 못가면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려고 했어요. 공부한 것도 없고, 축구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보니 공장에 들어가려 했던 거죠. 고3 마지막 경기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터라 대학 입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김 감독님이 절 포기하지 않으신 거죠. 1학년 내내 공식 경기에 나설 수 없었어요. 대신 연고전에는 출장했습니다. 내가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기전에서 축구부가 고려대를 꺾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1학년 정기전에서 2-2로 비기며 7년 만에 고려대를 상대로 지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축제 분위기였어요. 2학년 때는 시국이 어수선해서 정기전이 열리지 않았고, 3학년 때는 결승골을 터트리며 짜릿한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4학년 때도 골을 터트리면서 졸업 전까지 제 몫을 제대로 해냈습니다.”

(김호곤 감독은 성한수가 문일고에 다닐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성한수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문일고와 일부러 연습 게임을 잡았을 정도였다고. 성한수는 연습 게임 때마다 골을 터트리며 김 감독에게 확신을 심어줬고, 그 덕분에 성한수가 3년이란 경기출전정지를 당했음에도 그를 연세대로 불러 들인 것이다. 김 감독은 호남대가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했던 ‘KBSN 추계 1,2학년대학축구대회’ 결승전을 직접 현장에서 관전했고, 사연 많은 애제자의 첫 우승을 축하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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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시티즌에서 활약할 때의 성한수 감독 모습.>


1999년 드래프트 1순위로 대전 시티즌에 입단했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만큼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어요. 

“프로에서 정말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게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오랜 아픔을 잊기 위해 프로에선 펄펄 날고 싶었거든요. 동계훈련부터 쉬지 않고 체력을 끌어 올렸습니다. 중국전지훈련 중에 연속으로 6골을 성공시키며 기대감을 부풀렸고, 안정환이 뛰는 부산과의 개막전에서도 첫 골을 터트리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그 달 월간 MVP를 수상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10게임을 풀타임 출전했는데 그게 무리가 됐는지 포항 원정에서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어요. 암담했습니다. 수술 후 재활해서 복귀까지 1년이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재활한 끝에 복귀하는 시간을 단축해서 7개월 만에 그라운드에 나섰는데 이번에 또 무릎을 다치게 된 거예요. 결국 대전에선 데뷔 초에만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이후엔 수술과 부상이 반복되면서 몸값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후 2002년 1월 당시 최고의 이적료인 7억 원을 받고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어요. 

“전남에서도 부상은 반복됐습니다. 3년 동안 이전과 같은 일상이 반복됐어요. 자꾸 부상이 잦다보니 자신감도 잃었고, 다시 일어설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대전에 내준 이적료를 도로 갖고 오라며 제게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전 동계훈련에 참가한 기억이 없어요. 그때마다 독일에서 수술을 받고 재활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팀 동계훈련에는 제가 없었던 거죠. 독일에만 모두 네 번을 갔어요. 두 번은 수술이었고, 두 번은 재활 훈련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축구인들 많이 만났어요. (고)정운이 형도 수술 후 그곳에서 재활 중이었고, (김)은중이, (백)승철이 형, (노)정윤 선배, (차)두리 등 많은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정운이 형 집에서 신세를 많이 졌는데 당시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했어요.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때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네요. 그 후론 독일이란 소리만 들어도 그 나라가 너무 싫더라고요(웃음). 이젠 선수로 뛸 일 없으니 독일은 여행으로 가보려고요.”

결국 2007년 은퇴를 선언했는데요, 은퇴 후에 창원시청 소속으로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했더라고요. 선수로 뛸 수 있는 몸 상태였다면 프로에서 선수 생활을 해나가는 게 여러 가지 면에서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프로는 경쟁이 치열하고, 몸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굉장하잖아요. 은퇴 전에 창원시청에 입단하려 했던 건 아니에요. 쉬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창원시청이 창단되면서 제게 연락이 왔던 거죠. 은퇴 후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몸 상태가 괜찮아졌어요. 결국 창원시청 유니폼을 입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고, 창단팀이 대통령배대회에서 3위에 오르는 깜짝쇼를 펼쳤습니다. 당시 경남 FC 박항서 감독님이 창원시청에서 뛰고 있는 절 데려가려 하셨는데 경남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었죠. 3년을 창원시청에서 뛰다가 이후 완전히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창원시청에선 대우가 괜찮았나요?

“당시 막 결혼을 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3개월 동안 월급이 120만 원 밖에 안 들어왔어요. 120만 원 중에서 30만 원은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아기 키우며 생활했죠. 그래도 창단 첫 해 우리가 대통령배 3위에 오르면서 연봉이 대폭 올랐습니다. 4000만 원으로요. 120만 원 받다가 한 달에 300만 원 씩 들어오니까 부자가 된 것 같더라고요. 아내랑 가끔 창원 생활에 대해 회상해보는데 우리 부부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해요. 무엇보다 부상 없이 경기를 뛰었고, 더 이상 독일로 가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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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수는 전남에서 은퇴 후 3년간 창원시청 선수로 활약했다.>

아내가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면서요?

“꿈은 의상 디자이너였는데 지금은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남편 미래가 불투명하다보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방송통신대에서 영어를 공부한 이후 호주로 연수를 떠난 후 귀국해선 영어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몇 년 전에 천안에 학원을 차렸을 때는 제가 학원 차량 운전 기사로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지방대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선수 스카우트이죠. 선수들이 지방으로는 잘 안 오려 하니까요. 포항제철고나 광양제철고에서 좋은 선수들을 뽑고 싶은데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연고대 출신의 선수들만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팀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많이 주거든요. 다행인 건 절 알아보시는 학부모님들이 계셔서 대화를 나누는데 도움은 되고 있어요. 뭐 어쩔 수 없죠. 호남대에 실력있는 선수들이 늘어나려면 우리가 성적으로 보여주는 수밖에요. 며칠 전에 수원 삼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연습 게임 한 번 하자고. 속으로 ‘우승의 힘이구나’ 싶었습니다(웃음).”

축구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아쉬움이 생기는 ‘장면’은 언제인가요?

“프로 데뷔 후 월간 MVP를 받을 때만 해도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였어요. 신인 선수가 올스타전에도 뽑힐 만큼 잘 나갔었죠. 십자인대가 끊어지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습니다. 그때 내 몸을 스스로 잘 관리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젊다는 생각에 몸을 너무 혹사시킨 부분이 부상으로 이어졌다고 보거든요. 감독님이 ‘괜찮아?’하고 물어보시면 아파도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게 성실한 선수라고 배웠고, 근성있는 선수로 평가받았으니까요. 다시 선수 생활로 돌아간다면 몸 관리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어요.”

2001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월드컵 대표팀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면서요?

“당시 수술로 보조기를 차고 있을 때였거든요. 제 이름이 예비 명단에 올라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선수에게 ‘날 왜 뽑는데?’라고 물어봤을 정도였어요. 아마 내 몸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전 활약상만 보고 이름을 올렸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물망에만 올랐어요. 전 그 해 다시 독일로 향했으니까요. 수술 받으러. 덕분에 마일리지 많이 쌓았습니다(웃음).”

‘성한수=풍운아’로 보는 시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그냥 덤덤합니다. 당시엔 나도 어렸고, 어리다보니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고요.아버지가 4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임종 전에 내 손을 잡고 하신 말씀이 ‘한수야, 내가 미안하다. 그때 내가 심판을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하시며 우시더라고요. 아버지 손 부여잡고 나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명절 때마다 가족들 앞에서 소주 한 잔하시며 신세 한탄을 많이 하셨어요. 나랑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김은중, 이동국, 안정환은 모두 잘 나가는데 우리 아들은 당신 때문에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면서요. 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내 탓이었던 거죠. 내가 그땐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던 거고요.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느 축구대회에서 오랜만에 그 심판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서 인사드렸습니다. ‘그땐 정말 죄송했다’라고요. 그분도 잘 받아주셨습니다. ‘네가 어려서 그런 거니까 이젠 다 잊고 열심히 살라’고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성 감독은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의 축구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에 오랫동안 부대끼는 삶을 살다 간 아버지와 심판 폭행의 피해자였던 심판을 수년 만에 만나 진심으로 사과를 전했던 상황들이 그한테는 용서와 화해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나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영재이고, 아내 이름이 양성욱입니다. 아마 언론을 통해 이름이 소개되는 건 처음일 겁니다. 내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선수 생활의 성한수는 풍운아로 대변되지만, 지도자로서의 성한수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성한수의 축구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면서 좋은 선수들을 배출하고 성장시키며 실력을 쌓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꼭 성공하고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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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지도자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성한수 감독. 그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사진=이영미)>
 
<전남 광주=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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